조선시대 정조가 평생 사랑한 여인 의빈 성씨,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이미 드라마를 통해 많이 방영되었죠. 요즘 인기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으로 다시 한번 의빈 성씨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정조와 의빈 성씨
[ 의빈 성씨는 누구? ]
조선 22대 왕 정조의 후궁으로 본관은 창녕 이름은 덕임입니다. 정조를 15년이나 기다리게한 유일한 승은 후궁이죠.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덕임은 재능, 기술, 예술까지 갖춘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1753년에 태어나 1786년 향년 34세로 생을 마감했으며 문효세자의 생모입니다.

의빈 성씨의 아버지는 성윤우로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의 청지기였습니다. 청지기는 양반집의 수청방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잡일을 맡아보고 시중을 드는 하인입니다.
성윤우는 가난한 집안에 신분이 낮아 늦은 나이에 무관에 오릅니다. 1754년 경복궁 가위장이 되었고 여러 자리를 거쳐 1761년에 유원 첨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 뒤 관직을 그만두죠. 그리고 1769년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영조 38년인 1762년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로 입궁했습니다. 혜경궁에게는 정조, 청연 공주, 청선 공주가 있었지만 어머니를 자주 만나러 오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혜경궁이 자식 또래의 의빈을 자식처럼 기른것으로 추측됩니다. 같은 해 어린 정조는 효의왕후와 가례를 올렸고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고 말죠. 아버지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있던 정조는 의빈을 만나 소꿉친구처럼 가까이 지냈습니다.
[ 의빈 성씨 두번이나 승은을 거절하다 ]
1766년 정조가 승은을 내자 의빈은 울면서 거절합니다. 정조 15살, 의빈 14살 때의 일입니다. 의빈은 세손빈인 효의왕후가 아직 아이가 없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의빈은 권력에 욕심이 없었습니다.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죠.

임금의 승은을 거절한다는것 자체가 당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의빈의 거절을 수긍하고 기다렸죠. 1779년 정조 3년, 첫번째 간택 후궁인 원빈 홍 씨가 사망합니다.
1780년 정조는 화빈 윤씨를 간택하자고 했을 때 새 후궁을 들이는 것을 꺼리다 결국 받아들였습니다. 화빈 간택 이후 정조는 의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립니다. 하지만 의빈은 한번 더 거절하죠.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그녀는 결국 승은을 받아들입니다.
[ 왜 승은을 거절했나? ]
슬하에 자식이 없고 왕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는 왕비에 대한 배려라는게 공식적 이유입니다. 효의왕후와 의빈 성씨의 사이가 무척 좋았다고 하네요.
하지만 일각에선 승은 후궁들의 삶이 순탄치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또 정조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죠. 정조가 의빈을 사랑했다는 기록은 많지만 그 반대의 기록은 없기 때문입니다.
의빈 성씨 - 문효세자
[ 1780년~1781년 ]
첫째 아이를 임신하였으나 유산하였고 그 이듬해 둘째 아이도 유산했습니다.
[ 1782년 ]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를 낳았죠. 그당시 정조의 후사가 없었고 혜경궁 홍 씨 역시 그녀를 아꼈기 때문에 무척이나 고마워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은 의빈 성씨는 정 5품에서 정 3품 소용으로 올랐죠.
[ 1783년 ]
원효세자는 태어난 지 100일 뒤에 원자로 정해지며 의빈 성씨는 1783년 정 1품 '의빈'으로 진봉 됩니다. 그녀의 빈호인 의빈은 정조가 직접 지은 이름입니다. '화목하며 아름답다'는 뜻이라고 하네요. 정조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 1784년 ]
의빈성씨는 옹주를 낳습니다. 정조는 아들이 있는데 딸이 생기니 참으로 기쁘다며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옹주는 1784년 5월 갑자기 사망하였습니다. 왕실의 큰 슬픔이었죠.
[ 1786년 5월 ]
소중한 세자가 홍역을 앓다 죽고 맙니다. 잇따른 자녀들의 죽음으로 의빈 성씨는 중병에 걸려 본궁으로 피접까지 떠났다 돌아오죠.

정조는 직접 약을 달이는 것을 살피며 의빈성씨의 병을 낫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혹여 약에 누가 엉뚱한 짓을 할까 봐 약봉지와 그릇은 항상 침실에 보관하도록 했죠. 정조는 자나 깨나 의빈 성씨를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문효세자가 죽은지 4개월 후 9월에 그녀는 창덕궁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당시 의빈 성씨는 임신 9개월의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두 아이를 잃은 마음의 병이 결국 의빈 성씨를 죽음에 이르게 했죠. 정조는 밤을 새우며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20여 일 동안 정사를 돌보지 못할 만큼 그 슬픔은 컸습니다. 그리고 비석에 새길 글을 직접 지었죠.
바로 '어제비문'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정조가 의빈 성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아! 너의 근본이 굳세어서 갖추고 이루어 빈궁이 되었거늘 어찌하여 죽어서 삶을 마치느냐? 지금 이 상황이 참 슬프고, 애통하고 불쌍하구나. 평상시 화목하게 지냈건만 네가 나를 떠나 죽고 말았으니 너무 애달프고 슬프다. 네가 다시 살아나서 이승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이 한 가지 그리움이 닿아서 네가 굳세게 이룬다면 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서 궁으로 올 것이다. 이로써 마음 한가운데가 참 슬프고 애가 타며,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을 깨달았다. "
의빈 성씨 독살설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으로 독살설이 제기 되었죠.
- 은언군이 자신의 장남 상계군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의빈 성씨를 독살했다는 소문
- 내관 이윤목에 의한 독살
- '이재난고'에 따르면 화빈 윤 씨가 독을 썼다는 의혹
기록에 의하면 화빈은 의빈을 싫어하였으며 '방중술을 써서 세자를 낳았다' '중전을 질투하는 여자가 의빈이다'라는 소문을 냈습니다. 의빈 성씨가 죽자 화빈 윤씨가 독살한 것이며 정조가 화빈 윤 씨를 내쳤다는 소문이 돌았죠. 그만큼 의빈과 화빈의 사이는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조는 의빈이 죽고 그 무덤과 사당을 수차례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1790년 순조가 태어나자 더는 방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훗날 순조의 왕권을 위해 정조가 참은 것이죠.
역사적 기록으로도 정조는 한평생 의빈 성씨를 사랑했네요. 첫사랑이었고 끝사랑이었습니다. 의빈 성씨가 건강하게 오래 살았다면.. 문효세자가 죽지 않았다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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